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티오키아 공국 (문단 편집) === 보에몽의 몰락 === 하지만 신생 공국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안티오키아 북쪽에는 [[다니슈멘드 왕조]]가, 동쪽에는 [[모술]]과 [[알레포]]의 무슬림 제후들이 십자군 국가를 노리고 있었던 데다가, 주변의 동맹국인 [[예루살렘 왕국]]과 에데사 백국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힘이 벅찼고, 그나마 그들을 도울 여력이 되는 [[동로마 제국]]은 안티오키아를 제국 땅에 반환하라고 꾸준히 주장하고 있는 중이었다. 거기에 더해, 안티오키아 공국의 인구는 무슬림들까지 전부 모아 봐야 4만~5만여에 지나지 않았고,[* 당시로 쳐도 대도시 수준의 인구였다.] 기독교도들도 대다수가 십자군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거나, [[동로마 제국]]에 호의적인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시리아 정교회]], [[동방 정교회]] 출신이었다.[* 십자군 전쟁 당시, 중동의 기독교도 그러니까 동방 기독교 신자들은 서방 가톨릭 교회를 믿는 십자군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십자군 측에서는 서방 가톨릭 교회를 동방 기독교보다 중시했기 때문에 동방 기독교 신자들은 십자군과 서방 가톨릭 교회측이 자신들을 홀대한다고 여겼던 탓이다. 다만 동방 기독교 종파들 중에서 마론파 교도들은 서방 가톨릭 교회와 그나마 사이가 온건한 편이었다.] [[가톨릭]]을 믿는 인구는 지배층인 십자군 병사들 소수에 불과했다. 내우외환을 타개하기 위해 보에몽은 최대한 많은 노르만족들과 프랑크인을 안티오키아 공국으로 불러들이기로 했다. 이 당시 보에몽의 명령 하에 그의 연대기를 담은 '게스타 프랑코룸'이 작성되어 낭만주의에 빠진 많은 십자군들을 안티오키아에 정착하도록 유혹하였다. 또한 정통 기독교의 수호자를 자처한 보에몽은 당시까지 [[정교회]]의 관할이었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직을 빼앗아 [[라틴 총대주교]]좌를 설립하였다. 이렇듯 조금씩 공국이 안정되고 주변의 이슬람 세력들이 정리되자, 안티오키아 공국의 인구수와 병력은 늘어나기 시작했다. 겨우 수천의 노르만 기사들로 유지되던 공국의 병력은, 나중에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만 수천여 명의 병력을 부릴 수 있을 정도로 올라갔고, 인구수도 동로마 제국 시기의 전성기 수준은 아니었지만, 10만가량으로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안티오키아의 멸망이 목전에 있던 1263년에, 이미 전성기가 훌쩍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4만의 기독교인들과 10만의 비기독교인들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상황이 호전되자 보에몽이 처음으로 노린 지역은 [[아르메니아 왕국]]이 들어설 킬리키아 지역이었다. 그곳은 당시 [[다니슈멘드 왕조]]와 동로마 제국의 잔당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두 거대 세력의 경합 아래에서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를 믿는 소영주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1100년, 보에몽의 조카 탕크레드가 점령한 안티오키아 공작령 타르수스 지방에 아르메니아인들의 구원 요청이 들어왔다. 다니슈멘드 왕조의 병력들이 타우루스 산맥의 전술적 요충지 멜리테네의 영주를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멜리테네]]는 타우루스 산맥을 통제할 수 있는 주요 관문이었고, 만일 이곳을 차지한다면 킬리키아 내부에서 겨우 몇 개 도시와 항구만을 가지고 있었던 보에몽의 영향력을 늘릴 수 있는 기회였다. 보에몽은 겨우 수백의 기사대와 천여 명이 갓 넘는 보병대만을 이끌고 무모하게 멜리테네를 구원하러 갔다. 멜리테네에 거의 도착한 상황에서 [[다니슈멘드 왕조]]의 대군이 그들을 덮쳤고, 1100년 8월 그는 포로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유명한 보에몽 경매가 시작되었다. 주요 입찰자는 총 3명. 즉위하자마자 그에게 털리고 충성서약에 대해 배반까지 당했던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 니케아를 눈뜨고 빼앗기고 도릴레온에서 보에몽의 침착한 지휘에 대패하고 물러났던 룸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그리고 사로잡힌 보에몽 본인(...)이었다. 각 군주들의 입찰가는 다음과 같다. 알렉시오스 1세: 현찰박치기로 26만 디나르 킬리지 아르슬란: 13만 디나르와 휴전 협약[* 보에몽을 다른 사람에게 팔면 자신이 공격하겠다고 했다. 협박에 가깝다(...)] 보에몽: 13만 디나르와 군사적 협력[* 돈에 더 가치를 두지 않는다면 가장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을 것이다. 어차피 룸 술탄국과는 휴전이고 뭐고 틈만 나면 싸워댔으므로.] 다니슈멘드 술탄은 보에몽의 제안을 채택하였고, 보에몽은 석방되자마자 즉시 안티오키아로 돌아가 자신이 없는 사이 안티오키아의 공작 노릇을 하며 자신의 석방을 방해하던 조카 탕크레드를 축출하고 10만 디나르를 신민들에게 짜내 납부하여 다시 레반트의 주요 영주로 복귀하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세력이 커졌다고 생각한 보에몽은 커다란 오판을 하고 말았다. 1081년에 그랬던 것처럼,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약탈하여 영토를 늘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만 것이다. 그는 1104년에 자신의 고향이었던 남이탈리아에서 노르만 기사들을 모아 안티오키아에 귀속시켜 병력을 증편하고, 1081년에 황제 [[알렉시오스 1세]]를 이겼었던 디라히온에서 다시금 그와 맞닥드렸다. 하지만 30년만에 제국은 지중해 최강 타이틀을 회복한 상태였고, 보에몽은 잘 훈련된 [[동로마 제국]]의 군대를 이길 수 없었다. 1108년 보에몽은 디라히온에서 동로마군에게 대패, 동로마에게 안티오키아를 이양하겠다는 데볼 조약을 맺고 남이탈리아로 도피했다. 비록 안티오키아는 탕크레드의 술수 덕분에 동로마에게 빼앗기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잃은 보에몽은 실의에 빠져 1111년에 죽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